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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마음공부 & 감정읽기

오지랖 vs 무관심 = 과유불급

by 앨리Son 2020. 10. 2.

 

오지랖 vs 무관심 ?

 

양극단의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추석 명절의 풍경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가족과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차라리 무관심이 고마울 때가 있을 것이다.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부부, 결혼 적령기 내지는 혼기를 지난 사람들, 취준생 등등..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늘 받는 질문과 조언의 레퍼토리는 똑같을 것이다.

 

오늘 나눌 주제는 꽤 오래전에 써둔 글이라 명절 스트레스와는 무관하며, 특정 유형의 오지라퍼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나 무관심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지랖보단 무관심이 낫다고 말한다. 심지어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나 역시 무관심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굳이 하나 고르라면 무관심 쪽이다.

 

 

 

 

오지랖은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이르는데, 이 앞자락은 적당한 넓이면 충분한데 쓸데없이 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 입고, 너무 멀어지면 추워서 얼어 죽고 마는 호저의 딜레마(또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보는 듯하다. 인간은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평생 이 호저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결국 서로의 적정거리를 찾아내는 게 우리의 목적이다.

 

20대 후반, 어느 날에 있었던 일이다. 

늦은 밤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인적이 드문 어두운 가로등 불 아래서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이내 세차게 뺨을 갈기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20대로 보이는 커플과 60대 후반~70대 초반 정도의 어르신(남자)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뺨을 맞은 사람은 젊은 남자였는데 술 취한 어르신이 얼마나 악에 받쳐 때렸으면 그렇게 큰 소리가 났을까.

때린 건 어르신이지만, 그다음 상황에서 더 위험한 사람도 어르신이다. 여친은 남친이 이 싸움에 더 크게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달래고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폭력은 무조건 잘못된 일이다. 

남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달래서 20대 커플을 먼저 보내고, 그 어르신과 함께 걸으며 푸념을 들어드렸다. 화나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절대로 사람을 때리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런 행동도 오지랖 넓은 행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폭력 앞에서는 방관할 수 없었다.

 

누군가 위험한 순간이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방관해서는 안 되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땐 먼저 "도와드릴까요?"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오늘 이야기할 오지라퍼는 베풀기 좋아하고 지나치게 나서기 좋아하면서 덤으로 강요까지 심한 유형이다. 분명 이타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 이면에 숨은 이기심이 자꾸 엿보이는 경우이다. 안타깝지만 잘하고도 욕먹는 게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인심 좋고 잘 베풀고, 남에게 항상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어떻게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함께 있으면 묘하게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사람에 대한 적당한 관심과 배려는 필요하지만, 너무 넘치면 쓸데없는 간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여러모로 과한 면이 있고, 이는 상대방에게 불쾌감과 부담감, 압박감을 주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직장동료와 함께 먹을 음식을 매일 준비해오는 직원이 있다고 치자.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만족해하는 사람이다. 내가 베푸는 것에 누군가가 만족해하면 그것으로 인해 자신도 만족감을 느낀다. 딱 거기까지만 하면 인심 좋고, 잘 베푸는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간식이 자신의 손을 떠나서 사람들에게 전달되면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거기서 먹지 않는 사람에게 왜 안 먹냐고 계속 먹으라고 강요하게 되면 오지랖이 된다.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이유를 설명해도 강요는 계속 이어진다.

 

한마디로 "답정너" 스타일이다. 정답은 상대방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맙게 받아서 바로 먹는 것이다. 그걸 본인 눈으로 확인해야 만족감을 느끼는데,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행동을 보이면 정답이 나올 때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받은 간식을 좀 두었다가 나중에 먹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든 그건 받은 사람의 자유인 것이다. 인심 좋게 베풀면서 매번 거기에 하지 않아도 될 강요까지 덤으로 따라온다면 그걸 누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유는 있을 텐데 말이다. 원래 간식을 즐겨먹지 않는 편이거나, 식사를 든든하게 해서 배가 부르다거나, 소화가 안 돼서 안 먹거나, 다른 건강상의 이유가 있거나, 싫어하는 간식이거나, 다이어트 중이거나 등등.. 개인 사정은 다 다를 것이다. 

 

주는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좋으나 싫으나 우선 감사히 받고 먹는 시늉이라도 하는 걸 미덕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이 또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싫은데 참고 맞춰준 행동은 결국 뒤탈이 생기게 마련이다.

 

배가 부르거나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이려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데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건 술자리에서 술을 못 마시거나 적게 마시는 사람에게 자기 주량대로 자기 기분대로 억지로 권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반대로 자기는 거의 안 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끔 그런 사람들은 고장 난 기계처럼 느껴진다. 잘못된 프로그래밍 때문에 계속 똑같은 값만 반복 출력하는 것이다. 도무지 내 의사가 그들에게 반영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표현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다.

 

단지 사소한 간식 하나를 예로 들었지만, 매사에 항상 이런 식으로 강요를 한다거나 한발 앞서서 하지 않아도 될 (좋게 표현해서) 배려를 지나치게 한다면 상대방은 숨통이 막힐 것이다. 

 

그럴 땐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윗세대 어르신들이라면, 먹을 것에 대한 이런 강요가 충분히 이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해는 되지만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세대차가 아니라면 이런 오지라퍼의 숨은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 칭찬받고 싶어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으려 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정도에서 멈춘다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그것을 과하게 요구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기대했던 반응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는 강요로 이어지고, 그럼에도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상처받게 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과하게 잘하려는 행동이 부담스러운 집착과 강요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 중에는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경쟁할만한 일이 아님에도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경쟁적인 태도를 보일 때는 함께 하는 사람이 부담감과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경쟁에 관심 없는 사람은 제 할 일에 집중하느라, 타인과 견줄 시간조차 없다. 상대방을 경쟁자라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혼자서 경쟁하고 있는 오지라퍼는 자신의 경쟁자가 앞서가지 않게 자꾸 남의 행동에 제동을 건다. 선을 넘는 간섭을 자꾸 하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이런 사람들도 욕구가 서로 충족되는 사람과 만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많이 외롭고 애정이 결핍된 상태, 혹은 관심받기 좋아하는 성향이라면 누군가의 지나친 관심과 집착적인 행동이 반가울 수도 있다. 서로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면 나름 평화롭게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지나친 간섭은 사람을 불쾌하고 숨 막히게 만들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신의 위치가 리더의 역할이 아님에도 사사건건 모두 나서고 지시하려 든다면 상황이 꽤 피곤해질 것이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이 나서고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전혀 나서지 않고 수동적으로 따라가길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지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능동적인 사람이라면 자격 없는 간섭이 달가울 리 없다. 자신이 나서고 인정받고 돋보이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누군가는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줘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똑같은 쳇바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칭찬과 인정에 목마른 사람에게 그 욕구를 잠시나마 채워줄 수는 있지만, 맞춰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계속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방향으로 타인을 컨트롤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만 좋은 사람이고, 그래야만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뭔가 많이 잘못된 것이다.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심하게 좌지우지할 것이다. 이 잘못된 프로그래밍부터 인지하고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칭찬과 인정은 아끼지 말되, 좋고 싫음의 의사 표현 역시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거절이나 싫은 소리 잘 못하면 이런 사람들에게 휘둘리기 십상인데, 거절할 땐 칼같이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좋은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할 사람이라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적정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면 답답하고 숨이 막히지만, 좀 떨어져서 지켜보면 연민의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결국 결핍만 계속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진 욕구의 근원은 결국 하나이다. 사랑, 사랑을 느끼는 마음,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 

 

강아지 형제가 서로 물어뜯고 죽일 듯이 싸우는 것도 결국 주인에게 사랑받으려는 욕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이의 적정거리는 과연 어디쯤일까? 이건 아마 평생 공부해도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면 사람마다 느끼는 적정거리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상 +상황 +기분에 따라 그 적정거리의 갭은 더 커질 것이다.

 

오지랖 vs 무관심에 대한 결론을 맺기에 앞서, 관계에 따라서 대답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부부와 연인 또는 부모, 자식 관계라면 더더욱 맞지 않는 질문이다. 어디까지나 적당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번쯤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사랑, 배려, 관심, 존중, 도움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지나친 간섭보다는 제 할 일 잘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개인주의가 마음에 더 편안하게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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